<우리 시대의 안부를 묻다, '잘 지내나요, 지영씨들'_ 조남주 작가(3/29)>



집필 계기
첫 번째 소설을 썼을 때만 해도 당선을 목적으로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소재, 즉 소설 거리를 찾아다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첫 소설로 문학상을 받은 후 몇 년 동안은 소설을 발표하지 못했습니다. 소설로 밥벌이를 하지 못해 자존감이 바닥을 친 상황이었습니다. 소설은 제게 희망고문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시 1차를 10년 준비하는 느낌이 이런 걸까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82년생 김지영>을 쓰게 됐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은 당선 목적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얘기, 내가 잘 할 수 있는 얘기를 찾다가 쓰게 된 소설입니다. 올해까지만 써보고 안 되면 그땐 접자, 이렇게 생각하고 그저 열심히 썼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을 구상했던 2015년은 여성혐오 이슈가 본격적으로 불거지기 시작했던 때입니다. 개그맨 장동민, 유상무, 유세윤의 팟캐스트 방송에서 “참을 수 없는 건 처녀가 아닌 여자들” 같은 여성비하 발언을 쏟아냈고, 배우 김병옥은 남성지 ‘맥심’에서 성범죄를 미화한 화보를 촬영해 논란이 됐으며, 데이트폭력을 코믹하게 그린 웹툰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까지 가세해 ‘IS보다 무뇌아적 페미니즘이 더 위험해요’라는 칼럼을 쓰며 여성혐오 논란에 불이 붙었습니다. 이에 여성들은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는 해시태그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대한민국 여성의 삶을 왜곡 없이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이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커피를 한 잔 마셔도 ‘된장녀’ 소리를 들어야 하고, 아이를 낳아도 안 낳아도 욕을 먹고. 왜 대한민국 여자는 뭘 해도 욕을 먹을까. 대한민국 여성이라는 삶을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편 여성을 주제로 택하는 데 걱정이 앞섰습니다. 나의 발화가 어떤 사회적 맥락에 놓일지를 고민해야 했습니다. 제가 개념 없는 엄마에 대한 얘기를 소설로 풀어간다면 재미는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 주위에는 그런 엄마들보다 성실히 살아가는 엄마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여성의 삶이라는 주제를 표현하는 데 소설이라는 장르적 미덕이 방해가 된다면, 장르적 미덕을 버리고 여성의 삶을 표현하는 것만 취하기로 맘먹었습니다. 소설은 ‘보편적 여성의 일대기’에 관한 내용이어야 한다고 나름의 기준을 세웠습니다.

자료조사
인물만 잘 설정하면 그 인물들이 알아서 행동하고 말한다고들 하는데,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자료조사한 끝에 겨우 에피소드 하나 구상하고 그랬습니다(청중 웃음). 자료는 여성취업, 출산 및 보육, 여성 대상 범죄, 페미니즘 등 네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모았습니다. 일단 당시 쏟아졌던 여성혐오 관련 기획기사를 열심히 읽었습니다. <시사인>의 특집기사 ‘여자를 혐오한 남자들’을 참고했고요. <도미노>라는 잡지의 ‘김치년 백년사’라는 글도 참고했습니다. 대한민국 여성혐오의 역사를 10년 단위로 끊어서 서술한 글인데 대한민국 여성사 전체를 아우르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여성 캐릭터를 구상할 때는 여성주의 미디어 ‘일다’의 기사를 많이 읽었습니다. 일다의 웹사이트에 접속해보시면 가사노동자, 생계형 알바노동자, 간병인 등 다양한 여성 노동에 관한 르포가 있습니다. 여성 캐릭터를 만들고 싶은데 막힌다면 이 사이트가 아주 유용할 겁니다. 여성 노동에 관한 또 다른 참고자료로 <기록되지 않은 노동>이라는 책을 추천합니다. 부당하게 대접받아온 여성 노동에 관한 사례집입니다. 여성 노동은 보험 아줌마, 화장품 아줌마, 야쿠르트 아줌마 등으로 불리면서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지금도 그렇잖아요. 이 책에서 야쿠르트 아줌마를 30년 하신 분의 인터뷰를 읽고 아이디어를 얻어서 김지영 씨 어머니 캐릭터를 만들었습니다.

SBS스페셜의 ‘엄마의 전쟁’ 편을 보면, 그 누구보다 똑똑했던 여자들이 엄마가 되면서 겪어야 하는 전쟁 같은 하루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내가 성공하는 것이 목표였던 여자가 엄마가 되면서 맞닥뜨리는 고민들이 많을 텐데요, <서울대 엄마들>이라는 책에는 그 고민들이 잘 나와 있습니다. <서울대 엄마들>은 서울대를 졸업한 엄마들을 심층 인터뷰한 책입니다. 육아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한 여성분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애 키우면서 산다고 사람들한테 도저히 말할 수가 없어서 박사과정을 밟는다고 했습니다. 이 인터뷰를 읽고 아이스크림 가게 아르바이트생이 ‘저도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에요’라고 말하는 에피소드를 생각해냈습니다.

이 외에도 <확률가족: 아파트키드의 가족 이야기>라는 책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책을 보면, ‘우리 부모님이 13평짜리 주공아파트를 830만원에 사서 850만원에 팔았다’ 같은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김지영 씨 가족의 전반적인 모습을 그릴 때 이 책에서 많은 힌트를 얻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소설 잘 쓰라고 하늘이 내려주신 책 같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청중 웃음).

왜 82년생 김지영인가
82년생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까닭은 80년대 초중반에 태어난 세대들이 청소년기에 IMF를 겪고, 2012년 무상보육이 시작됐을 때 출산과 육아를 거쳤을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당시 정부는 보육시설에 맡기는 경우에 한해서 모든 만 0~2세 영유아에게 보육비를 지급했습니다. 즉, 집에서 아이를 키우면 돈을 안 주던 시대입니다. 어린이집의 대기 인원은 수백 명에 육박하곤 했습니다. 이때부터 엄마들에 대한 ‘도시괴담’이 출몰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젊은 엄마들은 애를 어린이집에 맡겨놓고 커피 마시고, 브런치 먹고, 손톱 관리를 받는 등 사치하는데 그 돈은 남편이 버는 돈이다, 같은 도시괴담 말입니다. 예전에는 엄마를 주책바가지로 보긴 했어도 엄마의 모성은 매우 위대하게 바라봤습니다. 반면 지금은 젊은 여성의 모성에 대한 비난의 강도가 날로 강해지고 있습니다. 아이를 왜 직접 안 키우고 어린이집에 맡기냐는 겁니다. 제가 2012년에 주목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인공의 이름이 김지영인 까닭은 70~80년대 가장 많이 등록된 이름이 ‘지영’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가장 흔한 성씨인 ‘김’을 붙였습니다. 매년 법무부에서 올해 가장 많이 출생신고된 이름을 조사해서 발표하는데요, 그 자료를 참고했습니다. 혹시 40년대 여자 이름에 가장 많이 쓰인 한자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순할 순(順)입니다. 50년대 여자 이름에 가장 많이 쓰인 한자는 맑을 숙(淑)입니다. 순하고 맑은 여자. 여자 이름에 많이 쓰인 한자를 보면 그 시대가 여성에게 요구했던 덕목이 보입니다. 60~70년대 여자 이름에는 진선미(眞善美)가 많이 쓰였습니다. 여성의 덕목에 아름다움이 포함되기 시작한 겁니다. 57년부터 시작된 미스코리아 대회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80년대에는 알 지(知)와 지혜 지(智)가 많이 쓰입니다. 80년대를 기점으로 여성에게도 똑똑함을 요구하기 시작한 거죠.

실제로 80년대부터는 아들딸 관계없이 귀하게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여자라고 대학도 못 가게 했지만 80년대생 여자는 대부분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점이 여성들에게는 더 혼란을 줄 수 있는 것 같아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여자도 남자 못지않게 다 할 수 있다고 교육 받으면서 컸는데 막상 사회에 나가보니 여성차별이 심한 겁니다. 출산과 육아 때문에 꿈을 접고 육아에 전념을 한다고 해도 온갖 사회의 비난을 다 끌어안아야 합니다. 이런 구조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여성들은 자신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자책하곤 합니다. 저는 소설에 이런 지점을 반영하려고 했습니다.

남성 등장인물의 이름이 없는 이유
벡델테스트는 미국 여성 만화가 엘리슨 벡델이 남성 중심 영화가 얼마나 많은지를 계량하기 위해 고안한 영화 성평등 테스트입니다. 이를 통과하려면 이름을 가진 여자가 두 명 이상 나오고, 이들이 서로 대화해야 하고, 대화 내용이 남성과 관련되지 않은 내용이어야 하는 등 3가지 기준을 만족해야 합니다. 이 기준을 놓고 제 소설을 보니 남편, 남동생 등은 다 이름이 있었는데 어머니, 할머니는 호칭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을 제외하곤 남성 등장인물의 이름은 지우고 평생 가족의 호칭으로만 불렸던 여성들에게는 이름을 붙어주었습니다. 남편도 처음엔 이름이 없었는데 ‘남편 정 씨’라고 하면 범죄자 같기도 해서 예외로 했습니다(청중 웃음). 남성 캐릭터는 지극히 평범한 캐릭터로 만들었습니다. 처음엔 김지영 씨가 데이트폭력을 당하고 유산을 겪는 것도 구상했지만 후에 범죄, 사건, 사고로 읽힐 만한 사건은 다 삭제했습니다. 그래야 남성 독자에게 거부감 없이 읽힐 것 같았고, 여성의 문제를 극중 남성 캐릭터의 문제로 전가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투고와 출간
예전엔 장편소설 한 편 쓰는데 몇 년씩 걸렸는데 이 소설은 석 달도 안 돼서 다 썼습니다. 주인공 캐릭터에 너무도 몰입됐기 때문입니다. 모두 제 얘기인 것만 같았습니다. 보통 가족이 모두 잠들면 식탁에 앉아서 소설을 썼습니다. 잠든 남편과 딸아이를 보면서 쓰는데 눈물이 많이 났습니다. 거의 매일을 울다시피 하면서 써내려갔습니다. 소설을 퇴고하고 보니 500매가 좀 안 됐습니다. 장편소설을 공모하려면 1000매는 되어야 하잖아요. 고민을 하다가 민음사 젊은 작가 시리즈가 500매 내외 짧은 장편을 취급하는 걸 알고 도전하게 됐습니다. 이 소설이 소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인과 얘기할 수 있는 촉매제가 될 것 같아서 뽑혔다고 들었습니다.

<82년생 김지영>은 문학평론가가 아닌 여성학자의 작품해설로 마무리됩니다.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결말이 해피엔딩은 아닙니다. 결국 현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 결말이 좀 꺼림칙했는데 여성학자의 작품해설로 마무리되니 ‘미완’인 제 소설이 ‘완성’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김지영 씨를 정신이상자로 가둬둔 것 같은 부채의식은 여전히 남아 있긴 합니다. 비록 이 소설은 끝났지만 무거운 마음은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글 유설희 <김창석 기자의 언론사입사준비 아카데미 64기> 수료생
사진 김영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