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중앙 신인상 소설부문 수상작] 2405 택시(1)_ 이정연(서유미의 플롯강화 과정 수료)
- 2017.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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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강생 작품
2405 택시(1)
오늘은 새벽조라 잠든 현서를 태워 거리로 나섰다. 안개가 자욱한 날이었다. 히터의 온도를 올리고 예약 표시등에 전원을 켰다. 혹시 현서의 소리가 녹음될까 봐 블랙박스는 껐다. 자주 울리는 택시 앱도 신경이 쓰여 종료 버튼을 눌렀다. 속도를 내지 않고 천천히 동네를 배회했다. 빈 차를 굴리는 걸 회사에서 알면 사직서를 쓰라고 할 테지만 일곱시 반은 되어야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받아주니 새벽에 일이 있는 날은 어쩔 수 없었다. 현서는 어느새 잠에서 깨어 카시트에 매단 장난감을 건드리고 있었다. 동요 시디를 켜고, 현서의 손에 비스킷을 쥐어줬다. 아이는 과자를 움켜쥐고 몸을 들썩이다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음식점 주차장에 차를 대고 현서의 엉덩이에 손을 넣었다. 기저귀가 푹 젖어 있었다. 지린내가 밀리오며 살갗에 가벼운 열기가 느껴졌다. 현서를 꺼내 기저귀를 갈고 카시트에 도로 앉혔다.
2405 차량, 방화동 도시개발 12단지 콜. 무전기에서 승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송정역에서 유턴을 해 차를 돌리기에 이미 늦었다고 말을 더듬었다. 승연은 난감하다는 투로 알았다고 말끝을 흐렸다. 아침부터 거짓말로 시작하기 싫어 앱은 껐는데 콜은 피할 방법이 없었다. 자주 하는 변명인데도 말은 늘 목구멍에 걸려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운전대를 잡고 기어를 바꿨다. 현서는 배가 고픈지 침이 흥건하게 젖도록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먹는 게 느린 아이라 이유식을 먹이려면 이십 분은 넘게 걸렸다. 십오 분만 있으면 어린이집에 맡길 수 있는데 시간이 애매했다. 현서에게 비스킷을 하나 더 쥐어주고 도로로 나섰다. 승연에게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손님이 울어요. 우는 시늉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요. 출근 시간이라 남는 차가 없다는데 막무가내로 택시만 보내달라니. 미안하지만 차 돌릴 수 없어요, 언니?”
평소 언니, 라는 호칭은 잘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십대 중반인 승연은 아무리 나이 많은 사람이라 해도 직급이 없으면 꼬박꼬박 누구 씨라고 불렀다. 승연이 언니라고 부르는 걸 보면 꽤나 거절하기 어려운 상대인 모양이었다. 나는 이십 분 정도 기다릴 수 있으면 가겠다고, 이십 분 뒤면 방화동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하면서 어린이집으로 차를 몰았다.
초겨울 해가 늦어지고 있었다. 안개까지 끼어 거리는 일곱시 반이 넘었는데 뿌옇기만 했다. 나는 전조등을 켠 자동차를 보고 겨우 도로를 짐작했다. 버스정류장에서 십 미터쯤 떨어진 자판기에 남자가 서 있었다. 이십 분을 기다리라고 하면 포기할 줄 알았는데 남자는 몇 분째 그 자리에서 대기했던 모양이다. 그나마 울었다던 손님이 남자라 다행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엉망으로 취해 몸을 더듬는 남자 승객만큼 울음을 터뜨리며 이해를 요구하는 여자 승객도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승객은 갓 스물을 넘긴 것 같은 젊은 남자였다. 오동통한 체격에 꽉 끼는 가죽 재킷과 황금색에 가까운 염색 머리, 몇 개인지 알아보기 힘들게 뚫은 귀고리는 아직 어른이라기보다는 어른이 되고 싶은 길거리 아이들의 분위기가 났다. 콜 부르신 분, 맞죠? 하고 묻자 남자는 고개를 쭉 빼고 환하게 웃었다. 남자에게 재차 도착지를 확인했다. 강남 고속터미널이라고 하셨어요? 남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정은 모르지만 만이삼천 원은 족히 나올 거리라 개시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해사한 미소를 짓던 처음과 달리 남자는 자리를 잡자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고속터미널 어느 방면에 차를 세우면 좋을지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남자는 시선을 창문 너머에 고정하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음량을 최대로 했는지 수화 대기음과 상대편 목소리가 내 자리까지 크게 들렸다. 두 번째 질문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손님을 태우면 먼저 행선지를 묻는다. 그리고 가는 방법을 이어 묻곤 한다. 두 번째 질문을 할 때 대부분의 손님은 그런걸 뭐하러 묻느냐는 반응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길을 잘 아는 손님보다 길을 몰라 택시를 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도 두 번째 질문을 하는 이유는 선호하는 길을 따지는 사람이 더러 있어서였다. 택시를 몰고 처음 몇 주 동안은 아는 지름길로 가거나 내비게이션을 켰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종종 있었다. 이 아줌마가 누굴 외국인으로 아나? 어디 우리 개성공단까지 관광이나 가봅시다. 경찰을 부르자는 걸 어르고 달래서 위로금을 주고 보낸 적도 있었다. 그렇게 불필요한 언쟁을 피하려다 보니 빤한 길을 묻게 되었고, 승객이 길을 모른다고 하면 아는 길도 내비게이션을 찍어 따라갔다.
그런데 두 번째 질문을 하기 전에 남자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목적지에 어떻게 갈지 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손님, 고속터미널까지 내비 찍고 가겠습니다, 하고 목소리를 냈지만 스스로의 감정에 젖어 있는 남자가 알아들었을지 의문이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짜증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여자의 흥분이 한풀 꺾여 잠잠해지자 남자도 목소리를 냈다. 행선지를 밝힐 때와 사뭇 다른, 심하게 흔들리는 목소리였다.
“어제는 잘해보자고 했잖아. 그 새끼랑 잔 것 가지고 안 괴롭힐게. 이해하겠다고, 씨발. 알았어. 욕 안할게. 나 지금 경부 탔어. 제발, 응?”
택시는 경부고속도로가 아닌 올림픽대로 위에 있었다. 운전만 하려는 데도 나의 관심은 자꾸 뒷좌석으로 돌아갔다. 남자는 흐느끼다가 매달리다가 변명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내지르는 음성이 떨릴 만큼 화조차 시원하게 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소리만 지르는 여자도 거슬렸지만 미안하다고 애원하는 남자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한참의 승강이 끝에 남자는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돌연 목소리를 바꾸며 전화를 끊었다.
국회 앞을 막 지나고 있었다. 택시가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아무리 출근 시간이라지만 시속 십 킬로미터를 내지 못할 정도로 막히는 도로가 아니었다. 아침부터 공개 방송이라도 있나, 하고 방송국으로 고개를 돌렸다. 좌석 목받침에 남자의 손이 갑자기 들어왔다. 장난해요, 지금? 순간 놀라 핸들을 놓칠 뻔 했다.
“왜 돌아가는데요? 서부간선 탔으면 됐을 걸, 막히는 여의도로 왜 왔냐고요!”
남자는 좌석을 치며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방금까지 여자가 만나주지 않는다고 매달리던 사람이 맞나 의아할 지경이었다. 어깨를 풀고 운전대를 세 번 꽉 움켜쥐었다. 회사 택시를 몬 지 5개월이 지났다. 그간 운전 실력도 늘었지만 눈치와 인내도 늘었다. 승객과 마찰이 있을 때 억울함을 피하려고 입을 떼었다가 숙여지지 않은 머리를 억지로 떨어뜨려야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비게이션을 찍고 간다고 말씀드렸는데, 통화하느라 못 들은 모양이네요. 남자는 단호하게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다고 말을 잘랐다. 아까, 하고 다시 말을 붙여보았지만 대꾸를 해봤자 달라질 게 없어 보였다. 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게다가 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좌석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있었고. 나는 고속터미널까지 택시 요금이 보통 얼마 나오느냐고 말을 돌렸다. 남자는 미터기를 살피고는 만천 원 정도? 하고 얼버무렸다. 비스듬히 쳐다보는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미터기는 만사천 원을 찍고 있었다. 그럼 그 돈만 받겠습니다, 손님. 나는 남자의 시선을 피해 미터기를 껐다.
내가 돈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에요. 요즘이 어떤 시댄데 아직도 승객한테 바가지를 씌우려고 하세요. 이런 거 SNS에 올리면 끝이라고요.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주 똑같아요. 남자는 손목에 두른 매듭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십 년 전을 들먹였다. 눈은 어느새 물기가 말랐고, 뭔가를 이해시켜야 한다는 눈빛으로 고개까지 끄덕이고 있었다. 미러에 비친 의기양양한 표정에 피식 웃음이 났다. 십 년 전 그는 기껏해야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었을 거다.
남자는 택시에 오를 때 지었던 밝은 표정으로 터미널에서 내렸다. 그는 꼬깃꼬깃 접은 만천 원 두 장의 지폐를 내밀며 수고하라고 인사까지 건넸다. 재킷에 손을 꽂고 휘적휘적 걷는 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어린 남자의 뒷모습을 보니 억울함보다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남자는 어디로 향할지, 어떻게 될지 모를 길보다 돌아가는 게 나을 수도 있는데, 나는 터미널로 사라지는 남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미터기와 차이 나는 삼천 원을 보태 사납금 봉투에 채워 넣고 택시 승강장으로 차를 돌렸다. 덜 채워진 봉투가 마음에 쓰였다. 하루 십만 원이 넘는 사납금은 늘 손이 닿지 않는 미래 같았다. 오늘 닿았다 해도 내일이면 또 미래가 되어버리는 십만 원짜리 미래. 경험 많은 기사들은 법이야 어떻든 합승을 하거나 돈이 안 되는 곳을 거부하는 식으로 할당량을 채웠다. 그러나 나는 개인택시를 몰 형편도 아니었고, 경력도 충분하지 않아 사람들이 몰리는 거리를 그저 쫓아다녔다. 사실 신고를 당해 일을 못할까 봐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개시부터 만 원이 넘는 손님을 태웠고, 내린 곳이 터미널 근처라 시작이 아주 나쁜 건 아니었다. 삼천 원쯤이야, 손님을 찾기 위해 대기한 비용으로 계산하면 되었다.
(계속)
오늘은 새벽조라 잠든 현서를 태워 거리로 나섰다. 안개가 자욱한 날이었다. 히터의 온도를 올리고 예약 표시등에 전원을 켰다. 혹시 현서의 소리가 녹음될까 봐 블랙박스는 껐다. 자주 울리는 택시 앱도 신경이 쓰여 종료 버튼을 눌렀다. 속도를 내지 않고 천천히 동네를 배회했다. 빈 차를 굴리는 걸 회사에서 알면 사직서를 쓰라고 할 테지만 일곱시 반은 되어야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받아주니 새벽에 일이 있는 날은 어쩔 수 없었다. 현서는 어느새 잠에서 깨어 카시트에 매단 장난감을 건드리고 있었다. 동요 시디를 켜고, 현서의 손에 비스킷을 쥐어줬다. 아이는 과자를 움켜쥐고 몸을 들썩이다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음식점 주차장에 차를 대고 현서의 엉덩이에 손을 넣었다. 기저귀가 푹 젖어 있었다. 지린내가 밀리오며 살갗에 가벼운 열기가 느껴졌다. 현서를 꺼내 기저귀를 갈고 카시트에 도로 앉혔다.
2405 차량, 방화동 도시개발 12단지 콜. 무전기에서 승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송정역에서 유턴을 해 차를 돌리기에 이미 늦었다고 말을 더듬었다. 승연은 난감하다는 투로 알았다고 말끝을 흐렸다. 아침부터 거짓말로 시작하기 싫어 앱은 껐는데 콜은 피할 방법이 없었다. 자주 하는 변명인데도 말은 늘 목구멍에 걸려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운전대를 잡고 기어를 바꿨다. 현서는 배가 고픈지 침이 흥건하게 젖도록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먹는 게 느린 아이라 이유식을 먹이려면 이십 분은 넘게 걸렸다. 십오 분만 있으면 어린이집에 맡길 수 있는데 시간이 애매했다. 현서에게 비스킷을 하나 더 쥐어주고 도로로 나섰다. 승연에게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손님이 울어요. 우는 시늉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요. 출근 시간이라 남는 차가 없다는데 막무가내로 택시만 보내달라니. 미안하지만 차 돌릴 수 없어요, 언니?”
평소 언니, 라는 호칭은 잘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십대 중반인 승연은 아무리 나이 많은 사람이라 해도 직급이 없으면 꼬박꼬박 누구 씨라고 불렀다. 승연이 언니라고 부르는 걸 보면 꽤나 거절하기 어려운 상대인 모양이었다. 나는 이십 분 정도 기다릴 수 있으면 가겠다고, 이십 분 뒤면 방화동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을 하면서 어린이집으로 차를 몰았다.
초겨울 해가 늦어지고 있었다. 안개까지 끼어 거리는 일곱시 반이 넘었는데 뿌옇기만 했다. 나는 전조등을 켠 자동차를 보고 겨우 도로를 짐작했다. 버스정류장에서 십 미터쯤 떨어진 자판기에 남자가 서 있었다. 이십 분을 기다리라고 하면 포기할 줄 알았는데 남자는 몇 분째 그 자리에서 대기했던 모양이다. 그나마 울었다던 손님이 남자라 다행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엉망으로 취해 몸을 더듬는 남자 승객만큼 울음을 터뜨리며 이해를 요구하는 여자 승객도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승객은 갓 스물을 넘긴 것 같은 젊은 남자였다. 오동통한 체격에 꽉 끼는 가죽 재킷과 황금색에 가까운 염색 머리, 몇 개인지 알아보기 힘들게 뚫은 귀고리는 아직 어른이라기보다는 어른이 되고 싶은 길거리 아이들의 분위기가 났다. 콜 부르신 분, 맞죠? 하고 묻자 남자는 고개를 쭉 빼고 환하게 웃었다. 남자에게 재차 도착지를 확인했다. 강남 고속터미널이라고 하셨어요? 남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사정은 모르지만 만이삼천 원은 족히 나올 거리라 개시 치고는 나쁘지 않았다.
해사한 미소를 짓던 처음과 달리 남자는 자리를 잡자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는 고속터미널 어느 방면에 차를 세우면 좋을지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남자는 시선을 창문 너머에 고정하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음량을 최대로 했는지 수화 대기음과 상대편 목소리가 내 자리까지 크게 들렸다. 두 번째 질문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손님을 태우면 먼저 행선지를 묻는다. 그리고 가는 방법을 이어 묻곤 한다. 두 번째 질문을 할 때 대부분의 손님은 그런걸 뭐하러 묻느냐는 반응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길을 잘 아는 손님보다 길을 몰라 택시를 타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도 두 번째 질문을 하는 이유는 선호하는 길을 따지는 사람이 더러 있어서였다. 택시를 몰고 처음 몇 주 동안은 아는 지름길로 가거나 내비게이션을 켰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종종 있었다. 이 아줌마가 누굴 외국인으로 아나? 어디 우리 개성공단까지 관광이나 가봅시다. 경찰을 부르자는 걸 어르고 달래서 위로금을 주고 보낸 적도 있었다. 그렇게 불필요한 언쟁을 피하려다 보니 빤한 길을 묻게 되었고, 승객이 길을 모른다고 하면 아는 길도 내비게이션을 찍어 따라갔다.
그런데 두 번째 질문을 하기 전에 남자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목적지에 어떻게 갈지 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손님, 고속터미널까지 내비 찍고 가겠습니다, 하고 목소리를 냈지만 스스로의 감정에 젖어 있는 남자가 알아들었을지 의문이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는 짜증 섞인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여자의 흥분이 한풀 꺾여 잠잠해지자 남자도 목소리를 냈다. 행선지를 밝힐 때와 사뭇 다른, 심하게 흔들리는 목소리였다.
“어제는 잘해보자고 했잖아. 그 새끼랑 잔 것 가지고 안 괴롭힐게. 이해하겠다고, 씨발. 알았어. 욕 안할게. 나 지금 경부 탔어. 제발, 응?”
택시는 경부고속도로가 아닌 올림픽대로 위에 있었다. 운전만 하려는 데도 나의 관심은 자꾸 뒷좌석으로 돌아갔다. 남자는 흐느끼다가 매달리다가 변명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내지르는 음성이 떨릴 만큼 화조차 시원하게 내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소리만 지르는 여자도 거슬렸지만 미안하다고 애원하는 남자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한참의 승강이 끝에 남자는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돌연 목소리를 바꾸며 전화를 끊었다.
국회 앞을 막 지나고 있었다. 택시가 제 속도를 내지 못했다. 아무리 출근 시간이라지만 시속 십 킬로미터를 내지 못할 정도로 막히는 도로가 아니었다. 아침부터 공개 방송이라도 있나, 하고 방송국으로 고개를 돌렸다. 좌석 목받침에 남자의 손이 갑자기 들어왔다. 장난해요, 지금? 순간 놀라 핸들을 놓칠 뻔 했다.
“왜 돌아가는데요? 서부간선 탔으면 됐을 걸, 막히는 여의도로 왜 왔냐고요!”
남자는 좌석을 치며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방금까지 여자가 만나주지 않는다고 매달리던 사람이 맞나 의아할 지경이었다. 어깨를 풀고 운전대를 세 번 꽉 움켜쥐었다. 회사 택시를 몬 지 5개월이 지났다. 그간 운전 실력도 늘었지만 눈치와 인내도 늘었다. 승객과 마찰이 있을 때 억울함을 피하려고 입을 떼었다가 숙여지지 않은 머리를 억지로 떨어뜨려야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비게이션을 찍고 간다고 말씀드렸는데, 통화하느라 못 들은 모양이네요. 남자는 단호하게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다고 말을 잘랐다. 아까, 하고 다시 말을 붙여보았지만 대꾸를 해봤자 달라질 게 없어 보였다. 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게다가 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자신의 좌석을 주먹으로 내리치고 있었고. 나는 고속터미널까지 택시 요금이 보통 얼마 나오느냐고 말을 돌렸다. 남자는 미터기를 살피고는 만천 원 정도? 하고 얼버무렸다. 비스듬히 쳐다보는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미터기는 만사천 원을 찍고 있었다. 그럼 그 돈만 받겠습니다, 손님. 나는 남자의 시선을 피해 미터기를 껐다.
내가 돈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에요. 요즘이 어떤 시댄데 아직도 승객한테 바가지를 씌우려고 하세요. 이런 거 SNS에 올리면 끝이라고요.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주 똑같아요. 남자는 손목에 두른 매듭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십 년 전을 들먹였다. 눈은 어느새 물기가 말랐고, 뭔가를 이해시켜야 한다는 눈빛으로 고개까지 끄덕이고 있었다. 미러에 비친 의기양양한 표정에 피식 웃음이 났다. 십 년 전 그는 기껏해야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었을 거다.
남자는 택시에 오를 때 지었던 밝은 표정으로 터미널에서 내렸다. 그는 꼬깃꼬깃 접은 만천 원 두 장의 지폐를 내밀며 수고하라고 인사까지 건넸다. 재킷에 손을 꽂고 휘적휘적 걷는 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어린 남자의 뒷모습을 보니 억울함보다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제 남자는 어디로 향할지, 어떻게 될지 모를 길보다 돌아가는 게 나을 수도 있는데, 나는 터미널로 사라지는 남자를 잠시 바라보았다.
미터기와 차이 나는 삼천 원을 보태 사납금 봉투에 채워 넣고 택시 승강장으로 차를 돌렸다. 덜 채워진 봉투가 마음에 쓰였다. 하루 십만 원이 넘는 사납금은 늘 손이 닿지 않는 미래 같았다. 오늘 닿았다 해도 내일이면 또 미래가 되어버리는 십만 원짜리 미래. 경험 많은 기사들은 법이야 어떻든 합승을 하거나 돈이 안 되는 곳을 거부하는 식으로 할당량을 채웠다. 그러나 나는 개인택시를 몰 형편도 아니었고, 경력도 충분하지 않아 사람들이 몰리는 거리를 그저 쫓아다녔다. 사실 신고를 당해 일을 못할까 봐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오늘은 개시부터 만 원이 넘는 손님을 태웠고, 내린 곳이 터미널 근처라 시작이 아주 나쁜 건 아니었다. 삼천 원쯤이야, 손님을 찾기 위해 대기한 비용으로 계산하면 되었다.
(계속)
